김태윤 Kim, Taiyoun

김태윤 개인전: 기울어진 광장 Tilted Dutzendteich

2015. 11. 05 – 2015. 12. 06

오프닝 2015. 11. 05, 18:00 – 22:00
장소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3-42, 2층
운영시간 금토일 14:0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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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전경 Exhibition View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작가의 정치적 의도와 예술의 상관 관계

글: 박유리

이 글은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1902-2003)의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 1935)와 김태윤의 <뉘른베르크 두첸타이히 광장>(Nürnberg Dutzendteich, 2014) 사이의 세 가지 공통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첫 번째로 두 영화 모두 다큐멘터리 장르로 분류될 수 있다. 두 번째는 그들의 작품이 뉘른베르크라는 동일한 장소, 그중에서도 나치의 전당대회가 열렸던 건물들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두 감독 모두 각자의 영화를 만들 때 어떠한 정치적 의도가 없었음을 누차 밝혔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는 193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던 나치의 제6차 전당대회를 기록한 영화이다. 김태윤의 <뉘른베르크 두첸타이히 광장>은 당시 전당대회가 열렸던 체펠린비행장(Zeppelinfied)과 전당대회장이 오늘날 다양한 지역 행사가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보여준다. 뉘른베르크라는 물리적 공간만 동일할 뿐, 리펜슈탈과 김태윤 각각의 영화 속에서 뉘른베르크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 글의 목적은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는 마지막 공통점이 그들의 작품에서 어떻게 맥락을 달리 하는지 살펴보고 그로부터 작가의 정치적 의도와 예술의 상관관계를 둘러싼 오해를 정정하는 데 있다.¹ 먼저 두 작품의 차이를 간략히 살펴보자.

<의지의 승리>가 그 내용은 물론, 그것이 제작된 배경에도 불구하고 영화사적인 측면에서 꾸준히 회자되는 근거 중 하나는 당시의 다큐멘터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촬영 기법들을 시도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렇게 획기적인 장면들을 통해 <의지의 승리>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바로 다수의 군중이 단 한 사람을 찬양하는 일이었다. <의지의 승리>가 히틀러를 지도자로서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의 이면에는 개별성이 사라진 군중의 모습이 있다.

반면 <뉘른베르크 두첸타이히 광장>은 억압된 군중이 사라진 전당대회장, 체펠린비행장과 그 주변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김태윤의 영화에서 뉘른베르크는 더 이상 나치, 히틀러, 전체주의를 상징하지 않는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의 뉘른베르크, 계절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뉘른베르크를 보여줄 뿐이다.

<의지의 승리>가 리펜슈탈의 필모그래피로서 뿐만 아니라 영화사에 있어서도 한 획을 그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영화 자체는 나치 전당대회의 기록의 결과물일지언정 본인은 중립적 위치였다는 리펜슈탈의 주장도 <의지의 승리>가 갖는 형식적 의의를 옹호하는데 힘을 실어주는듯 하다. 하지만 그러한 입장들은 <의지의 승리>보다 더 훌륭한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는 가능성이 나치에 의해 차단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전체주의 논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폭력적인 측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김태윤의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지역 행사, 계절의 변화는 그러한 전체주의에 가려져 있던 도래할 가능성들의 일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지의 승리>가 갖는 유일하게 탁월한 지점은 흑백영상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무채색의 영상이 다채로운 가능성들이 묵살된 상황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작가의 정치적 행보나 작품의 내용이 예술로서의 옳고 그름을 재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반대로 작품의 좋음이 작가의 그릇된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작가는 다만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의 잣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뿐이다. 나치가 전횡을 일삼던 시대이건 21세기이건 사회는 작가로 하여금 정치적 행위나 가치판단의 눈치를 보게끔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전부다. 요컨대 작품에 있어 정치적 의도의 유무는 작가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작가가 속한 사회 안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작가에게 작품의 정치적 의도에 대해 묻는 것은 관객은 물론 작품의 측면에서도 무의미하다. 이는 자신이 영화를 찍는 데 있어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는 리펜슈탈의 주장이 합리화될 수 없는 이유이다. 나아가 우리가 예술을 접함에 있어 작가가 작품을 통해 무엇을 묻고자 하는가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은 사회 안에서 무언가를 특정하려는 시도나 정치적 억압들에 있어 가장 자유롭게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소통의 매체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리펜슈탈과 김태윤의 세 번째 공통점은 전혀 다른 결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의지의 승리>와 <뉘른베르크 두첸타이히 광장>은 특정하게 고정된 세계로서 뉘른베르크와 불확정적인 세계로서 뉘른베르크 사이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김태윤의 작품 속 뉘른베르크는 <의지의 승리>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뉘른베르크의 여러 일면 중 하나이다. 리펜슈탈이 뉘른베르크를 나치 전당대회장으로서 규정하고 촬영에 임했다면, 김태윤은 반대로 뉘른베르크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으로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 과정에서 또는 작업이 끝난 후에도 김태윤이 뉘른베르크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변화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끊임없이 탐구와 문제제기가 예술의 고유한 영역 중 하나라면, 뉘른베르크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 김태윤의 작품은 예술의 ‘질문하는 능력’을 잘 보여 준다.

뉘른베르크는 현재도, 앞으로도 특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뉘른베르크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지켜보고 질문할 수 있을 뿐이다. 작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정치적 의도를 묻기보다는 그가 작품을 통해 이 세계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를 주목해보자.


 

¹ 이를 테면 영화의 도입부가 뉘른베르크 상공에서 착륙하는 비행기로부터 시작된다든가 히틀러가 군중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도 히틀러와 교감하는 듯한 간접적 경험을 자아내게 했다는 것이 그러하다.